광수는 왜 이렇게 사과에 집착할까?
#연극 속 광수
12기 종방 직후에 유튜브에서 진행된 라이브 방송이 진행됐는데 왜 그렇게 말할 때마다 느낌표니, 마침표니 비유를 남발하고, 끝까지 옥순에게 사과하는 데 집착했었냐는 질문에 광수는 ‘스스로 너무 몰입을 했다. 솔로 나라 안에서 마치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대답합니다. 즉 연극 속 나의 역할에 너무 몰입했다는 정확하고 솔직한 대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딱 그 말대로 광수가 처음에 써 내려간 시나리오는 옥순과 커플이 되어 나가는, 해피엔딩의 로맨스물이었습니다. 근데 그 이야기는 옥순에게 까이면서 어그러졌고 차선으로 수정 들어갔던 게, 한 때 서로 좋은 감정과 추억을 분명히 나눴지만, 광수 본인의 실수로 깨져버린 새드엔딩의 로맨스물이고 이걸 신혼집데이트 때 상황극을 통해 풀어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번째 시나리오, 에필로그
광수는 이 두 번째 시나리오에 굉장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마침표가 찍혔지만 더 써보고 싶은 이야기 '에필로그'라는 타이틀을 부여하며 옥순이가 자기가 꼭 할 필요가 없지 않냐는 말과 반응도 그래서 애써 무시하고 무리하게 눈을 감아버리며 상황극을 강제로 진행시킵니다. 둘이 잘 되어가는 와중에 광수가 저질렀던 실수들을 심각하게 혼내주길 바랐습니다. 마치 광수의 그 실수들이 옥순이 거절한 원인이었던 것 마냥, 바로 그 실수들이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처럼 혼내주길 바랐습니다. 결과는, 옥순에게 심각하게 혼나긴 혼났습니다. 옥순이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몰아붙였으니까. 다만 그 혼낸 이유는 광수가 원했던 지점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광수는 옥순이 우리의 서사를 반추하면서 광수 본인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옥순의 속도를 무시했던 부분 등을 지적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야만 옥순이 나를 처음부터 남자로 보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처음에는 날 남자로 봤고 호감도 가졌고 그래서 잘해보려고 하다가 내가 실수를 저지른 바람에 관계가 어그러진 것이다. 즉 광수 스스로 이별을 자초한 것이다. 옥순이 처음부터 거절을 염두에 뒀던 게 아니라. 이걸 옥순에게 인정받는 게 이 에필로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처음부터 광수에게 진지한 호감은커녕 크게 별 뜻 없었던 옥순은 광수가 내밀었던 자신 분량의 대본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로 어제 분명히 거절했는데 다시 와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하나만을 가지고 혼냅니다. 광수가 저질렀다는 그 실수가 대체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 실수가 거절한 이유의 본질이 될 수 없으며 그냥 광수는 이성적으로 끌리지 않았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광수는 이 단순 명료한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광수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이 문제라고 자꾸만 여기고 싶은 것 같습니다.
#3번째 시나리오
그래서 등장한 세 번째 시나리오, ‘옥순에게 얼굴 맞대고 사과하기’입니다. 보통의 경우 사람은 누가 내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는 걸 반길 수가 없는데, 이때 광수는 전혀 아닙니다. 가능한 한 자신의 범실이 만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공언되길 희망합니다. 그에 대한 처벌이 아무리 무섭고 힘들어봤자,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남성성이 부정당하는 것만큼은 아닐 테니까 계속 자기 잘못과 그것을 자책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상철에게 한동안 쏟아냅니다. "나 혼자 너무 빨리 불타버렸던 것 같다. 산불 마냥. 그래서 나도 옥순도 불길에 집어 삼켜졌다." 여기에 신혼데이트 때 옥순이 손수 추가시켜 준 잘못까지 더합니다. "이건 내가 실수한 게 맞다. 한 번 더 트라이할 때 잘못 굴러갔다. 옥순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감정은 이제 상관없다." 혼자 감정을 너무 앞서 나갔던 것도 잘못, 한 번 더 트라이한 것도 잘못. 온통 광수의 잘못 투성이로만 의식에 도배를 해놓는 의식입니다. 내 잘못을 앞으로 내밀면 내밀수록 옥순이 나를 실은 남자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려질 수 있어 광수는 필사적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까지 여전히 광수는 자기만의 세 번째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는 중이고, 관객을 상철 한 명으로 제한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철이 가장 수용적이고 공감을 잘 해주니까 광수가 자신의 시나리오를 통과시키기가 그저 쉽기 때문입니다. 여출들은 물론 다른 남출들의 검열은 무섭습니다. 자기 일 외에는 별로 관심 없는 영호, 뺀질뺀질한 영식, 내가 말실수할 때마다 무안 주는 영철... 누구 하나 명 쉬운 사람이 없습니다. 영수가 빠졌는데 실은 제일 거추장스러운 게 영수입니다. 절대 영수 때문에 까인 게 아닌데, 이때 광수는 옥순이 가슴으로 선택했다는 영수를 연적이라며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중간에 대화에 끼려는 영수를 산통 다 깬다면서 저지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연극배우의 마무리
이제 광수에게는 세 번째 시나리오, 지금까지 내가 옥순에게 벌였던 모든 잘못을 사과하는 미션만이 남았습니다. 이 미션의 목표가 진정으로 용서받는 것까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광수가 필요한 건 내 잘못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들을 옥순 역시 잘못이라고 인정해 주는 그 자체입니다. 신혼 데이트 때는 이게 전혀 안 됐기 때문에 지금은 옥순이 이 사과를 받아주는 장면이 그저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사과하고 싶다면 간단히 쪽지로 전달하면 됐을 텐데 옥순에게 사과하는 것은 옥순이 내 잘못을 인정해 주는 것이고, 광수 입장에서 이러한 옥순의 공인은 굉장히 중요한 트로피이기 때문에, 이 인증 절차를 그렇게 간소화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옥순과 제대로 사람 대 사람으로 얼굴 맞대고 사과해야만 했던 거죠. 근데 네 번이나 시도했지만 옥순이 한 번을 안 만나주는 관계로 이 세 번째 시나리오도 이렇게 일단락됩니다. 끝까지 옥순을 출연시키려 했던 시도가 좌절되고 광수는 하릴없이 종을 향해 터덜터덜 나아갑니다.
광수는 5번의 종을 치며 옥순이 자신을 선택해 준 때를 그리며 좋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진정한 배우의 몰입감 가득했던 4박 5일의 연극도 함께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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